'네'가 먼저 나오는 손가락
쉽게 꺼낸 '네'는, 다음 주의 자신이 대신 갚는 약속이 된다.
퇴근 30분 전, 메시지가 하나 온다. '혹시 이번 주 안에 이 자료 한 번만 봐 줄 수 있어요?' 손가락은 벌써 '네, 볼게요'를 치고 있다. 전송 버튼을 누르고 나서야 목요일과 금요일에 무엇이 잡혀 있었는지가 떠오른다.
부탁을 받는 순간에는 미래가 넉넉해 보인다. 다음 주 달력은 아직 하얗고, 거절하는 불편함은 바로 눈앞에 있다. 그래서 그 불편함을 피하는 쪽으로 손이 먼저 움직인다. 막상 그날이 오면 그 하얀 칸이 원래 비어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. 쉬려던 저녁, 미뤄 둔 약속, 원래 하려던 일이 거기 있었다.
곤란한 것은 거절을 못 하는 것이 아니라, 생각할 틈도 없이 나오는 대답이다.
상대가 윗사람이거나 오래 알고 지낸 사이일수록 대답은 더 빨라진다. 망설이면 정 없어 보일까, 바로 돕지 않으면 서운해할까. 그 걱정이 대답보다 반 박자 먼저 도착한다. 돕고 싶은 마음은 진짜인데, 그 마음을 지킬 시간이 정말 있는지는 확인하지 않은 채로.
'일정 확인해 보고 내일 오전까지 답드릴게요.' 이 한 문장은 거절이 아니다. 상대에게는 언제 답을 받을지 알려 주고, 이쪽에는 하룻밤을 준다. 하룻밤 뒤의 '네'는 같은 글자여도 무게가 다르다. 그때의 '네'는 달력을 보고 고른 대답이다.
그런데 이 문장을 처음 보내는 날에는 손가락이 꽤 오래 머뭇거린다. 보내고 나서도 화면을 몇 번 다시 본다. 상대가 서운해하지는 않을까, 성의 없어 보이지는 않을까. 빠른 '네'가 피하게 해 주던 불편함이, 이번에는 고스란히 이쪽으로 온다.
미뤄 둔 답을 약속한 시각에 보내는 일이 몇 번 쌓이면, 부탁하는 쪽도 그 리듬을 알게 된다. 그 리듬이 관계를 멀어지게 할지, 오히려 서로를 편하게 할지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.
다음 부탁은 아마 또 퇴근 30분 전에 온다. 손가락은 이미 자판 위에 있다.
생각해 볼 질문
'네'라고 하고 나서 마음이 무거워졌던 부탁이 있었다면, 그때 무엇을 확인했으면 달랐을까요?
무거웠던 이유가 시간이었는지, 일의 내용이었는지, 그 사람과의 관계였는지 나눠 보세요.