이름은 모르지만 매일 보는 얼굴들
출근길에는 대본도 대사도 없는 고정 출연진이 있어요.
7시 48분 버스 맨 뒷자리 창가에는 늘 회색 배낭이 앉아 있어요. 두 정거장 뒤에는 이어폰을 한쪽만 끼는 학생이 타고, 환승역 계단에서는 매일 같은 자리에서 신발 끈을 다시 묶는 사람과 엇갈려요. 이름은 하나도 몰라요. 말을 섞어 본 적도 없고요.
그런데 어느 날 그 회색 배낭이 안 보이면 이상하게 신경이 쓰여요. 휴가일까, 이사했을까, 회사를 옮겼을까. 물어볼 방법도 없고, 물어볼 사이도 아닌데 말이에요.
이런 얼굴들을 부를 말이 마땅치 않아요. 아는 사람이라기엔 아는 게 없고, 모르는 사람이라기엔 너무 자주 봐요. 친구도 이웃도 아닌데, 내 아침의 배경에는 꼬박꼬박 나와요.
이 출연진은 쓸모도 있어요. 회색 배낭이 이미 앉아 있으면 오늘은 늦지 않은 거고, 신발 끈을 묶는 사람을 계단 위쪽에서 만나면 1분쯤 늦은 거예요. 휴대폰 시계를 보기도 전에 사람으로 시간을 읽는 거죠. 꽤 정확한 시계예요. 배터리도 안 닳고요.
동네에 산다는 느낌도 이런 데서 오곤 해요. 친한 이웃이 한 명도 없어도, 편의점 계산대의 같은 얼굴, 아침마다 같은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사람, 버스 기사님의 짧은 인사가 쌓이면 이 길이 그냥 길이 아니라 '내가 다니는 길'이 돼요.
그렇다고 내일 말을 걸어 보자는 얘기는 아니에요. 이 관계는 서로 아무것도 묻지 않아서 편한 관계거든요. 갑자기 '매일 뵙네요' 하고 인사를 건네면, 다음 날부터 둘 다 다른 칸에 탈지도 몰라요.
눈이 마주쳤을 때 고개를 아주 조금 끄덕이는 정도라면 서로 부담이 없어요. 대사는 없어도 출연진끼리는 서로를 알아보니까요.
그리고 하나 더. 내가 그 사람들로 시간을 읽는 동안, 나도 누군가의 아침에서 '오늘은 늦지 않았다'는 표시일지 몰라요. 이름도 모르는 누군가의 시계가 되어 있다는 것, 생각해 보면 꽤 근사한 역할이에요.
생각해 볼 질문